[첫발자국] ‘처음’이었던 매 순간 / 이수련, 배우·前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나는 배우다. 30대에 연기의 길을 처음 시작한 배우. 배우가 되기 전, 나는 10년간 청와대에서 근무한 대한민국 대통령경호실 최초의 여성 경호관이었다. 배우가 된 지 어느새 5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대통령 경호관 출신 배우를 수식어로 붙이며 신기하고 의아해한다. “왜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늦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나요?” 직업을 바꾼 이후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안정적인 것이 새로운 것보다 안전하다는 생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데에는 적절한 때(=한 살이라도 어릴 때, 대략 20)가 있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를 바탕으로 한 질문이다.

처음이라는 단어에는 늘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관계, , 장소 어느 것이든 첫 시작은 늘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막연한 불안감의 경계에 있다. 나라고 뭐 특별하겠는가? 말 그대로 역사상 처음이라는 최초의여성 경호관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갈 때도, 또 그렇게 쌓은 10년의 경력을 뒤로 하고, 전혀 다른 배우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을 할 때도, 설렘만큼의 두려움과 두근거림만큼의 불안함 사이에서 자신을 저울질해야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은 이미 내 삶은 지나온 매 순간과 매 선택이 처음이었고, 그 과정을 거쳐 얻은 모든 배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믿음이다.

남성이 대다수인 조직에 최초의 여성 경호관으로 들어가서 평탄하기만 했을까. 특히 여중, 여고, 여대를 졸업한 나로서는 사무실 생활부터 훈련, 군경(軍警)과 함께 하는 조직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낯설었다. 낙하산을 메고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고무보트를 메고 갯벌을 구를 때에도, 고막을 뚫을 듯한 굉음과 반동에 놀라며 사격을 하고 비 내리는 연병장에서 동기들과 축구공을 찰 때도 그 순간을 처음 겪어내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했기에 해낼 수 있었을 뿐이다. 나만 그렇겠는가? 경호실이라는 특이한 경력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에서 처음 맞는 순간에 처음일 선택을 하고 있다. 어차피 경호관으로서의 처음도 잘 살아왔는데, 배우로서의 또 다른 처음은 시작하지 못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또 묻는다. “청와대 10, 그 아까운 경력을 왜 버리고 나왔어요? 후회하지 않나요?” 의아한 질문이다. 정작 나는 버리고 나온 게 없는데. 내가 버린(?) 것은 명함 한 장뿐이고, 그 경험과 성장치는 내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 명함에 패인 직함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이룬 일부이며 나 자신 역시 조직을 이루는 일부에 불과하다. 사회적 지위를 자신과 동일시하면 언젠가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다른 도전을 하게 될 때 지나온 과거에 발목 잡히는 시간이 길어질 뿐이다. 모든 처음은 0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저쪽에서 이룬 100을 이쪽에서 인정받으며 시작하고 싶어 하면, 새로운 시작과 도전은 바람직한 처음이 될 수 없다. 나 역시 청와대에서 10년의 경력이 있든 말든, 연기 분야에선 무명의 신인배우임을 처절히 자각하고 바닥부터 발로 뛰어 수백 번의 문전박대를 거쳐서야 가까스로 요만큼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듯이.

새로운 도전을 하면 그 전의 일들은 가치 없고 무의미한 시간 낭비에 불과할까? 아니다. 나는 20대에 연기를 전공하고 무대에서의 경험 대신 다른 경험을 쌓았고, 이는 좋은 배우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을 근접에서 수행하고 각종 훈련을 받고 수많은 국제행사를 거치며 단순히 신박한 경험을 한 것이 아닌, 20대의 인간 이수련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사람을 대하는 법, 사고방식, 어울림, 마음가짐, 생활습관 등, 모두 내 안에 고스란히 배어 새로운 길을 가는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준다.

누구나 낯선 것은 불편하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편한 것, 익숙한 것을 찾고 안주하게 된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체하면 더 이상의 발전이나 변화도, 그에 따른 두근거림과 설렘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주어진 틀에 나를 맞추며 안주할지, 변하고자 하는 내 몸에 맞춰 세상의 틀을 바꿔나갈지는 내가 선택할 몫이다. 나는 미래에 마냥 설레고 싶은 쪽이다. 나도 변하고, 내가 속한 틀도 변화시키고자 뭔가를 계속 배운다. 요새는 마흔 전에 백 덤블링을 해보고자 아크로바틱도 배우고 있다. 성공 여부는 미지수지만, 언젠가 멋진 액션 연기를 위한 기초 트레이닝이 될 수도 있겠지. “참 피곤하게 산다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피곤하면 그 때 쉬어가면 되니까. 새로움과 불안함의 경계에서 처음에 도전하는 누구든, 각자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스스로를 믿어주기 바란다. 그 힘든 걸 우리가 해내왔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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