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송강호 "나의 작은 능력이 누가 되지 않길"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동물적 생존 본능. 난세에 인간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숙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제대로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송강호의 가장 큰 숙제다. 차지수 기자

9월 7일(수) 개봉을 앞둔 <밀정>에서 송강호는 소용돌이치는 시대에서 살아남고자 흔들리는 인간, 이정출을 연기한다.

 

“<변호인>부터 <사도>, <밀정> 그리고 지금 찍고 있는 <택시운전사>까지, 어쩌다 보니 역사의 변곡점에 서 있는 인물들을 연달아 연기했다. 과연 나의 작은 능력으로 그 분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부담이 있다면 그것 하나다.”

 

‘작은 능력’이라는 건 송강호의 지나친 겸손이다.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물의 고단함은 언제나 송강호의 얼굴을 타고 관객의 마음을 잡는다. 속물 변호사가 법정에서 달아오른 얼굴로 가슴을 쳤을 때도(<변호인>), 아버지가 끝내 아들을 잔인하게 뒤주에 가둬 죽였을 때도(<사도>) 송강호는 매번 시대의 물살과 그 안에 휩쓸린 사람의 진동을 함께 보여줬다. 조선인 일본 경찰 이정출을 연기하는 <밀정>에서는 최소한의 표정만으로도 그걸 해낸다.

 

“이정출은 항상 내면을 감추기 때문에, 더 디테일한 표현이 필요했다. 옛 친구 김장옥(박희순)에 대한 일말의 애틋함 혹은 의열단원 김우진(공유)를 만났을 때의 냉철함 등 마음 속에 여러 가지를 가진 인물이다. 눈빛이나 조금의 각도 변화로만 그 깊이감, 켜켜이 쌓여가는 복잡한 감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정겨운 유머로 관객을 웃기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 자체가 희로애락 아닌가. 아무리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웃음이 새어나오고, 가장 즐거운 순간에도 한 구석엔 우울이 있기 마련이다. 의도하고 계산한 웃음이라기 보다는 자연발생적인 유머다.” 긴박한 상황에서 송강호가 툭 찍어주는 쉼표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그 순간을 완성한다.

 

 

“촬영장에서 이제는 내가 가장 선배인 경우가 많다. 연기적으로나 전체적인 분위기로나 모든 후배들의 중심이 돼 줘야 한다는 게 신경 쓰인다.”

 

송강호가 끄는 수레 뒤엔 그를 든든히 받쳐주는 후배들이 있다. 송강호는 <밀정>으로 처음 호흡을 맞춘 공유에 대해 “맑은 이미지를 가졌고, 그게 김우진 캐릭터와 딱 맞다. 내가 김우진이라고 상상해보라. 뭔가 께름칙하지 않나. 공유는 순수 결정체 같은 느낌이 있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시모토 역의 엄태구에 대해서도 “자신의 잠재력을 제대로 폭발시켰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이하 <놈,놈,놈>) 이후 8년 만에 송강호와 만난 특별출연 이병헌은 상당한 내공으로 송강호를 즐겁게 했다. 짧은 대사와 적은 분량만으로도 스크린을 꽉 채우는 이병헌의 존재감은 분명 남다르다. 송강호는 “<놈,놈,놈> 때의 박창이(이병헌)가 떠올랐다. 이병헌은 내가 참 좋아하는 후배이자 훌륭한 배우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에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함께 작품을 만드는 후배들은 연기 20년차 문턱에 선 송강호를 가장 긴장시키는 존재다.  베테랑 고참의 고민은 자신이 고참이라는 사실 자체다. “이제는 배우, 스태프, 제작자보다도 내가 선배인 경우가 잦다. 연기로나, 전체적인 분위기로나 모든 후배들의 중심이 돼 줘야 한다는 게 어렵지는 않아도 사실 신경 쓰인다.”

 

 

<밀정>

“김지운 감독이 작가적 욕심을 내려놓고 오롯이 시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이분법적으로 분류할수 없는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있었나.”

 

<밀정>의 궁극의 방점은 ‘이정출’이 아닌 ‘시대’에 있다. 친일 혹은 반일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시대를 관통했던 사람들, 그 고뇌의 발단을 개인이 아닌 세상에서 찾는다. 선택의 기로에 선 한 개인의 혼란을 통해 그를 궁지로 몰고 간 시대의 아픔을 조명하고,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영화가 바로 <밀정>이다.

 

“내가 이 영화를 하고 싶었던 이유이자, 새로운 김지운 감독을 볼 수 있게 된 기회이기도 하다. 김지운 감독이 작가적 욕심을 내려놓고 오롯이 시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이분법적으로 분류할수 없는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있었나. 이들을 통해 과연 조국은 무엇인지 큰 세계관을 완성해가는 영화다.”

 

송강호는 이정출도, 김우진도 아닌 유일한 여성 의열단원 연계순(한지민)에 대한 애틋함으로 <밀정>의 주춧돌을 세웠다. “연계순이야말로 진짜 주인공이다. 단순히 유일한 여성 단원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다. 이정출이 그 작고 가냘픈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했다는 게  괴롭지 않나. 가장 보호받고 힘을 얻어야 하는 존재, 우리 민족의 자화상 같은 존재를 발견해 달라. <밀정>의 중심은 거기에 있다.”